폴 블레이(Paul Bley 1932.11.10 ~ 2016.01.03)

새해의 시작과 함께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죽음은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이번 원숭이의 해도 마찬가지. 새로운 출발의 느낌으로 가득했던 지난 1월 3일, 폴 블레이가 세상을 떠났다. 만으로 계산하는 미국 나이로 83세-우리 나이로는 85세가 된다-였다. 요즈음 “백세인생”이란 노래가 인기를 끌고 있다지만 나이로 보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망이었다. 게다가 가장 바람작한 죽임이라 할 수 있는 자연사였다고 하니 흔히 말하는 호상(好喪)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잘 몰라도 2008년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2008년 이후 새로운 앨범 녹음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공연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쇠약을 알리고 싶지 않아 했던 것 같다. 2008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가졌던 공연을 담은 앨범 <Play Blue>을 2014년에 발표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앨범에 담긴 연주는 그의 건강을 의심할 수 없게 했다. 전에 없던 사랑의 감미로움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래서 죽음의 그림자는커녕 긴 공백을 두지 않고 꾸준히 앨범을, 그것도 해에 따라서는 한번에 여러 장을 발표했던 그가 비교적 오랜 시간 새로운 앨범을 선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했다.

1932년 캐나다 퀘벡의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그는 비밥 시대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찰리 파커, 레스터 영, 벤 웹스터 등 비밥 시대의 거장들과 활동할 정도로 선이 굵은 시작이었다. 이후 베이스 연주자 찰리 밍거스와 활동하며 그의 도움으로 첫 앨범 <Introducing Paul Bley>(1953)을 선보이고 1960년대에는 지미 주프레와 전설의 트리오 활동을 하면서 소니 롤린스와 콜맨 호킨스의 만남을 담은 <Sonny Meets Hawks>(1963)에 참여하고 스티브 스왈로우(베이스) 페트 라 로르카(드럼)와 트리오를 이루어 앨범을 녹음하는 등 활동을 했지만 음악적인 뛰어남과 상관 없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서 녹음을 해 놓고도 몇몇 앨범을 발매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는 ECM, 스티플체이스, 임프로바이징 아티스츠, 소울 노트, 저스트인타임 등의 레이블을 오가며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만 집중한 연주자였다. 그러면서도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하기를 즐겼다. 제일 알려진 것이 첫 아내 칼라 블레이를 발견한 것이리라. 버드랜드 클럽에서 담배를 팔던 칼라 블레이와 1957년 결혼한 이후 그는 그녀의 독특한 음악적 재능이 만개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두 번째 아내가 된 아넷 피콕과도 지속적인 호흡으로 좋은 결과물을 많이 만들어냈다.

한편 1958년에는 아직 이름을 얻기 전이었던 오넷 콜맨, 돈체리, 찰리 헤이든, 빌리 히긴즈를 기용해 함께 활동하기도 했는데 알려졌다시피 이 네 연주자는 이듬해 앨범 <The Shape of Jazz to Come>을 시작으로 프리 재즈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과론적이지만 폴 블레이가 아니었다면 이 네 연주자가 함께 할 수 있었을까?

키스 자렛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언젠가 폴 블레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중간부터 본 적이 있다. 그 속에서 자유로운 솔로 연주 방식에 대한 영감을 키스 자렛이 폴 블레이로부터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다고 폴 블레이가 키스 자렛보다 더 훌륭하다느니 하는 식의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폴 블레이는 그저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연주에 집중하고 싶어했을 뿐이니 말이다.

늘 새로운 연주를 하고 싶어한 결과 그의 음악은 매우 진보적인 맛이 강했다. 그 결과 대중적인 인기를 그리 많이 얻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연주를 즐겼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리듬, 멜로디, 화성 그리고 침묵까지 모두 공평히 고려한 연주를 펼쳤다. 어느 특정 부분에 치중하지 않았다. 리듬은 감추어진 듯 아닌 듯한 느낌으로 뒤뚱거리고 멜로디는 생략과 함축이 전제되어있으며 화성 또한 느슨한 결속으로 긴장을 유발하고 침묵은 이 모든 부분에 관여하는 것이 그의 연주였다. 나는 이것이 그의 연주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딘가 친근한 매력이 있다 싶으면 자유로움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마음대로 연주한다 싶으면 그 안에서 음악적 이야기가 들리곤 하는 연주.

한쪽에 치우침 없는 긴장의 연주는 모호하지만 그의 음악을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매번 새로운 상상을 자극했다. 새로운 무엇을 찾아 과거의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막 끝낸 연주를 포함한 과거의 연주 모두가 그 자체로 늘 새롭기를 바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Ida Lupino’등 몇몇 곡을 여러 앨범에서 연주하고 또 연주하곤 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연주는 늘 그 자체로 새로웠다.

언제나 새로움으로 가득한 연주를 펼쳤던 그에게 여러 해 동안 연주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머리 속의 새로운 영감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몹시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겨진 자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슬픔일 지 모르나 그의 사망이 차라리 잘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 마지막 한 장의 앨범을 더 남기지 못해 아쉬워했을까? 모르겠다. 그저 하늘에서 그의 자리가 피아노 앞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 그의 명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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