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프리셀(Bill Frisell 1951.03.18 ~ )의 음악 여정

현대 재즈는 이제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어졌다. 너무나도 많은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즈의 역사가 생성과 소멸의 역사가 아닌 확장과 공존의 역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재즈가 80년대 이후부터는 지배적인 흐름을 상실하고 많은 분화를 통하여 개인화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엇이 재즈인가?’라는 문제는 그 제기 자체가 잘못된 것이 되어버렸다. 초기 스윙과 즉흥 연주로 설명되던 재즈에 대한 정의는 이제 많은 변칙적인 리듬들과 정교한 작곡 앞에서 힘을 잃었다. 그리고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재즈적인 느낌이라는 것도 유럽의 정서와 만나면서 모호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재즈를 정의하려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재즈는 창조적인 그 무엇으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팝도, 클래식도, 월드 뮤직도 아닌 그저 진행상태로만 있는 다른 무엇, ‘Something Else!’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재즈의 비 규정 상태는 오히려 연주자들의 개성을 자유로이 드러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전통적인 비밥의 이디엄으로 연주한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 연주는 과거의 비밥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감상을 요구한다. 즉, 어떤 방식으로 연주하고 있느냐가 아닌, 그 연주로 무엇을 나타내고 있느냐에 대해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 재즈는 단순한 연주의 음악이 아니라 의미 생산의 음악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은 악기를 연주자 자신과 동일화하여 그에게 내재된 사고를 표현하는 것이 된다.

이제 우리가 공연을 보게 될 빌 프리셀의 음악 역시 단순한 연주 음악의 차원을 벗어난다. 그의 기타 연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전통적인 기타연주와 그 사운드로부터 벗어난 독창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연주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연주하지 않는다. 그보다 빌 프리셀의 음악은 상상의 음악, 시각의 음악이다. 언제나 그의 연주와 음악은 하나의 공간을 설정한다. 그리고 감상자에게 그 공간을 느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 내는 공간은 추상(抽象)에서 구상(具象)을 거쳐 가상(假像)을 향한다.

그의 초기 앨범들은 독일의 ECM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 ECM 레이블은 악기의 개별적 사운드를 명확히 재현하는 동시에 악기 그 자체가 아닌 악기를 감싸는 주변 공간의 느낌을 강조하는 한편, 악기와 악기 사이의 거리를 하나의 분리된 층으로 설정하는 사운드로 유명하다. 따라서 초기 빌 프리셀의 음악도 이러한 ECM 사운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 만큼 빌 프리셀의 관심사 역시 세밀한 화성적 탐구를 기반으로 하여 기타로 어떻게 다양한 색깔을 지닌 소리를 만들어 내는가에 있다. 이는 그의 첫 번째 앨범 <In Line>(1982)을 통해 잘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앨범에서 그의 기타는 딜레이와 리버브의 다양한 사용으로 비정형의 공간을 생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어떤 구체적이지 않고 심리적이며 몽환적인 것으로, 다른 경험과 연결되지 않는 순수하고도 절대적이며 음악적인 동시에 음향적인 공간이었다. 이미 이 당시 빌 프리셀의 기타는 단순한 기타가 아닌 기타의 영역을 벗어난 키보드와도 같은 것이었다. 마치 화선지에 먹물이 은근히 베어들 듯 그의 기타는 전방위 적으로 확장되어 급기야 기타 사운드임을 인식하게 만드는 처음의 어택마저도 무화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현재 빌 프리셀의 음악과 연관시켜볼 때 초기 빌 프리셀의 중요한 앨범은 <Rambler>(1985)다. 이 앨범에서도 그의 음악은 여전히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사운드의 결들을 절대적 공간 안에 조화로이 구성해 나가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앨범의 타이틀곡인 ‘Rambler’를 통해 앞으로 어떠한 음악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곡을 예로 들면 여전히 신비하고 따라서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듯한 우주적인 느낌의 사운드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곡을 이끄는 명확한 테마와 즉흥 연주들 속에는 빌 프리셀의 인간적인 넉넉함, 부드러움과 함께 이미 미국의 포크적인 향취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미국적 분위기는 리 타운센드(Lee Townsend)가 제작을 담당한 <Look Out For Hope>(1988)를 통해 보다 더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ECM에서의 활동은 분명 생산적이었고 그 활동을 통해 현대 재즈를 대표할만한 기타 연주자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유럽적인 향취가 더 많이 묻어나는 레이블의 특성은 그가 가슴에 품고 있었던 자신만의 음악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의 초기 앨범들은 따라서 리더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인 반면에 유럽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하면서 체득한 음악적 성과물의 종합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ECM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미국의 엘렉트라/논서치(Elektra/Nonesuch)레이블로 음악 실현의 무대를 옮겼다. 이후 지금까지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들을 20장이 넘는 앨범을 통해 실현해오고 있는데, 심리적이었던 초기 음악에 비해 이후부터의 음악에서는 시각적인 면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특히 미국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논서치(Nonesuch) 레이블에서의 그의 모든 앨범들은 각기 미국적 풍경의 다양한 시각적 기록과도 같다. 따라서 프리셀의 음악을 듣는 감상자는 먼지가 풀풀 날리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서부에서 말을 타고(<The Willies>, 2002) 우리네 시골 풍경처럼 풍요로운 들판과 정겨운 마을 풍경이 보이는 미국의 한 작은 마을들(<Nashville>, 1997)을 지나 황량함과 비정함이 엄숙하게 감도는 도시의 밤을 허무하게 방황하는 듯한 (<Blues Dream>, 2001)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왜 그의 음악은 미국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찬 것일까? 왜 그는 컨트리, 포크, 블루그래스 같은 장르를 재즈와 혼합하는 것일까? 이는 그의 음악 경험들과 상당한 관련을 맺는다. 빌 프리셀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어린 시절 재즈만을 듣고 성장하지 않았다. (현대 재즈가 과거와 비교해 재즈적이지 않은 방향으로까지 진행되는 것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다.) 컨트리 웨스턴 뮤직이나 록 등 다른 장르의 음악들이 그의 곁에서 음악적 자양분을 주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클라리넷을 배우다가 결국 평생의 연주 악기로 기타를 선택하게 된 것은 기타가 재즈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다른 장르의 음악들 때문이었으리라. 따라서 그는 초기부터 재즈를 직업적으로 연주하면서도 재즈의 전형성에서 벗어나 그만의 연주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록이나 컨트리, 포크 등의 연주자를 꿈꾸었던 것도 아니다. 그의 관심은 장르 이전에 기타 자체에 있었고 그 기타로 표현할 수 있는 그만의 음악일 뿐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재즈뿐만 아니라 기타가 주 악기로 사용되는 포크, 컨트리, 블루그래스 등의 음악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빌 프리셀만의 음악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의 사운드를 특징짓는 미국적인 분위기는 바로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다.

물론 빌 프리셀의 음악이 미국적인 공간을 형성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미국적 이미지의 다큐멘터리식 재현에 집착하고 있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 그보다는 미국적 음악 스타일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여 빌 프리셀의 내면에 있는 미국적인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적 정서가 강한 컨트리나 포크 같은 음악들은 빌 프리셀의 독자적인 음악을 형성하는 요인들 중 하나일 뿐 결코 재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를 위해 그의 1992년도 앨범 <Have A Little Faith>를 감상해 보자. 이 앨범은 미국음악의 종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밥 딜란(Bob Dylan),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스테판 포스터(Stephen Foster), 찰스 이브(Charles Ives), 빅터 영(Victor Young), 마돈나(Madonna)등 민요, 재즈, 컨트리, 팝 등 미국 음악가들의 다양한 장르의 곡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각 곡들은 모두 개별성을 잃고 빌 프리셀의 독자적인 해석에 의해 재단되어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과정을 통한 이후에 드러나는 것이다.

2001년 4월 시애틀 타임즈(Seattle Times)에 실린 빌 프리셀 관련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빌 프리셀의 한 경험은 그의 미국적 사운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 내용을 요약한다면, 어느 날 차에서 유명한 컨트리 여가수 돌리 파튼(Dolly Parton)이 남아프리카 밴드의 반주로 밥 딜란(Bob Dylan)의 ‘Knocking On Heaven’s Door’를 노래하는 것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이한 스타일의 요소들이 하나로 모였을 때 어떠한 풍경을 연출하게 되는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현재 빌 프리셀이 미국 음악 장르들의 혼용을 통해서 들려주고 있는 음악들이 바로 이러한 충격을 줄만한 것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빌 프리셀은 마치 여행을 하듯 다양한 미국 음악들을 재즈와 결합하면서 매 앨범마다 고유한 변화를 시도해왔다. 이러한 변화는 여러 상이한 요소들을 결합해 그 결과를 확인하고픈 빌 프리셀의 연금술사적 호기심 때문인데, 이런 이유로 그는 다른 연주자들과의 만남을 좋아한다. 그 만남을 통해 다른 연주자들의 음악을 흡수하고 다시 자신의 것으로 재생산해 낸다. 실제 그는 새로운 만남을 위해 리더로서의 활동 외에도 많은 세션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그 활동의 음악적 폭은 무척이나 넓다. 존 존(John Zorn)이나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의 난해하고 진보적인 음악부터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 그리고 최근의 노라 존스(Norah Jones)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지닌 다양한 음악인들의 앨범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세션 활동에서 그는 자신의 색을 유지하면서도 앨범에 설정된 방향에 잘 적응하는 열린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자신의 앨범을 제작하는 데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특히 그 음악적 편안함과는 달리 가장 충격적이었고 재즈와 가장 거리가 멀었던 앨범 <Nashville> (1997)은 그의 실험성과 개방성의 가장 충실한 예라 할 수 있다. 이 앨범은 재즈에 대해 보수적 관점을 지닌 사람들로부터 그가 재즈가 아닌 미국 컨트리 음악으로의 표변(豹變)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컨트리 웨스턴 음악과 무척 흡사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앨범을 자신도 컨트리 웨스턴 뮤직을 연주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녹음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낯선 연주자들과 만나서 함께 연주를 한다면 어떤 음악이 만들어질까?’하는 호기심에서 녹음했다는 사실을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밝히고 있다. 그리고 실제 이 앨범에서 그의 기타 사운드는 여전히 특유의 공간적 울림으로 컨트리적인 공간의 저변을 감쌀 뿐 결코 컨트리 웨스턴 그 자체가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한편 빌 프리셀은 거의 매년 새로운 앨범을 통해 음악적 변화를 제시해오고 있는데 올해에도 역시 <The Intercontinentals>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 역시 기본적으로 그가 음악을 생각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은 같다. 그의 오묘한 기타 톤은 여전하고 함께 한 연주자들로부터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하여 새로운 음악으로 발전시키는 빌 프리셀만의 방법론 또한 여전하다. 그러나 <The Intercontinentals>에 담긴 공간적 이미지는 이제 빌 프리셀이 새로운 공간을 꿈꾸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앨범에 담긴 음악들이 지금까지 그의 음악이 머물던 미국적 공간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앨범에는 미국의 포크, 컨트리는 물론 새로이 브라질이나 아랍 등 다양한 민속 음악들이 그의 새로운 음악 재료로서 추가되어, 미국을 벗어난 세계로 더욱 확장된 공간적 느낌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이 앨범에 참여하고 있는 브라질의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빈시우스 칸투아리아(Vincius Cantuaria), 그리스의 우드(Oud)와 부주키(Bouzouki)연주자 크리스토스 고베타스(Christos Govetas), 말리의 타악기 연주자이자 보컬리스트인 시디키 카마라(Sidikki Camara), 역시 말리의 기타리스트인 부바카 트라오레(Boubacar Trore) 등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일시적인 것일까? 이들의 만남은 지속될 것인가? 아니면 정말 빌 프리셀의 새로운 음악적 화두가 되어 기존의 미국적 공간에서 다양한 민속적, 음악적 요소들이 하나를 이루는 보다 확장된 빌 프리셀적인 공간으로 발전할 것인가? 이들은 이 한 장의 앨범만으로는 아직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로든 그의 음악이 계속 새로운 미지의 공간을 향하여 흥미롭게 진행될 것임은 분명하다.

끝으로 이제 오늘의 공연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해야겠다. 공연이라는 것은 연주자가 내 눈앞에서 직접 연주를 펼치기 때문에 관객들은 저절로 연주자의 행동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상당수의 관객들은 ‘과연 그 유명하다던 빌 프리셀은 어떻게 기타를 연주하는가?’ ‘어떻게 그만의 독특한 기타 톤을 형성하는가?’에 관심을 갖고 표를 예매했을 것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오묘한 기타 톤은 그 자체로 음악적이고 관심의 대상일 만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빌 프리셀은 우리에게 자신의 기타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한국에 오지 않았다. 그는 그의 음악을 보여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니 만약 빌 프리셀의 음악을 듣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부디 그의 손가락보다는 전체적인 사운드, 그의 음악이 제시하는 이미지를 열린 마음으로 쫓기를 바란다. 자! 그러면 이제 눈을 감고 조용히 소리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남았다.

photo: Paul Mo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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