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trakan Cafe – Anouar Brahem Trio

발매 2000
ECM 1718

Anouar Brahem - Oud
Barbaros Erköse - Clarinet
Lassad Hosni - Bendir, Darbouka

오늘 낮, 점심시간을 이용해 음반 매장에 갔더니 키스 자렛 트리오의 <Whisper Not> 다음으로 잘 팔리는 앨범으로 이 앨범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전의 존 셔먼, 데이브 홀랜드와 함께 한 <Thimar>(ECM 1998)도 꾸준한 인기를 누렸었다. 이처럼 아누아 브라헴의 음악은 은 서구 사회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음악이 주는 진지함이 그 이유이기도 하지만 아랍(튀니지아)계의 음악이 주는 낯섦과 그 명상적인 분위기가 주된 이유다. 유달리 인기를 끌었던 지난 앨범 <Thimar>에 대해 혹자는 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관광 음악이라고 약간은 부정적인 견해를 피기도 하는 것을 보면 내 이런 생각이 전혀 틀리지는 않은 듯 싶다.

이 앨범은 오스트리아에 있는 상트 제롤드라는 사원에서 녹음이 되었다. 아누아 브라헴의 고향인 튀니지아나 다른 아랍의 공간이 아닌 오스트리아라는 것이 좀 놀랍다. 어쩌면 이 점이 기획부터 월드뮤직과 다른 점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역시 내가 ECM 소개 글에서 말한 것처럼 각 곡과 곡 사이에 이 사원의 침묵이 편재한다. 이 사원이 만들어 내는 공간감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ECM이 잔향을 잘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이 앨범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풍부한 사원의 반향이 악기, 음악을 감싸고 있다. (이 과도한 반향을 부정적으로 말하고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간혹 반향이 악기를 침해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앨범의 처음을 장식하는 5초간의 침묵이 지나면 곧바로 아랍도, 유럽도 아닌 광활한 명상의 공간으로 인도된 느낌을 받는다.

아누아 브라헴의 우드를 비롯해 이 앨범에는 클라리넷과 타악기 벤디를, 다르부카가 등장한다. 구성상으로는 무척 단출한 편성이다. 그런데 각 악기들이 표현되는 양상은 사뭇 다르다. 보통 피아노가 없으면 기타가 리듬은 물론 전채 공간의 한 가운데 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드는 솔로를 지향한다. 오히려 전체 공간을 얇은 천처럼, 연기처럼 감싸는 것은 클라리넷이 만들어내는 공명이다. 수도원이라는 큰 공간하에 클라리넷은 음악의 영역, 한계를 드러낸다. 바로 그 위에 우드가 각 음마다 충분한 여백을 주면서 솔로를 펼친다. 그런 솔로에 종종 클라리넷이 화답을 하거나 우드 아래를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여기에 타악기는 자칫 오버할 수 있는 음악의 명상성을 절제하는 역할을 한다. 붕 뜨는 분위기를 현실에 붙들어 맨다고 할까? 이런 설명에 무슨 알라신을 찬양하는 종교적 음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아니다. 아누아 브라헴의 음악은 근동 문화의 입장에서 바라본 정신적 공간의 음악적 재현일 뿐이다. 얀 가바렉으로 대표되는 북유럽의 음악의 정제된 차가운 분위기가 아랍식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 그래서 가바렉과 브라헴이 만나 연주한 <Madar>(ECM 1992)라는 앨범이 있다.

아누아 브라헴의 음악적 기반은 이슬람 문화와 그 음악이다. 이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인도, 프랑스, 이태리, 노르웨이등의 음악과 교류해왔다. 그런데 이번 앨범은 다른 문화와의 교류라기 보다는 순도 높은 아랍 음악만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내가 이 앨범을 일종의 월드 뮤직으로 상표를 바꾸려는 것은 아니다. 이 앨범에도 여전히 즉흥적인 요소와 멤버간의 인터 플레이가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훌륭하다. 아무튼 그의 의도였건 아니건 이런 아랍적인 요소로 유럽의 음악 애호가들을 유혹하는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묘한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유럽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누아 브라헴과 같은 흔히 말하는 제 3지역의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그의 음악에 열광을 한다는 것이 약간은 꺼림칙한 느낌을 갖게 했던 것이다. 내가 느끼는 낯섦은 분명 서구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달라야 할텐데 왜 그렇지 못하는 것인지. 단지 국악을 사랑해야겠다, 국악이 상품성이 있다.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음악적 토양 위에 유럽인들이 그렇게 하듯이 주체적으로 재즈를 바라보아야 함의 필요성이 마냥 브라헴의 음악을 들으며 입을 벌리고 있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Astrakan Café>가 유럽인들이 말하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한 최상의 공간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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